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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죽던 날(옌 롄커)

by 아리하루 2025. 2.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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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죽던 날 책 표지

『해가 죽던 날』 서평 – 어둠 속에서 꿈을 꾸는 인간들

옌롄커의 *『해가 죽던 날』*은 하룻밤 동안 한 마을이 집단 몽유에 빠지는 이야기다. 하지만 단순한 악몽이나 초현실적인 이야기로 치부할 수 없는 강렬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현실과 환상이 교차하는 독특한 서사, 인간의 욕망과 죄의식이 얽혀 있는 상징적인 사건들, 그리고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은유가 작품 전반을 감싸고 있다.

밤이 지배하는 마을, 꿈이 현실이 되는 순간

이야기는 여름날 오후 5시에 시작되어 다음 날 아침 6시에 끝나야 하지만, 해는 떠오르지 않는다. 마을 사람들은 하나둘 꿈속으로 빠져들고,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가 무너진다. 마치 *‘들새가 머릿속으로 날아들어 온갖 욕망을 휘젓는 것’*처럼, 꿈속의 사람들은 본능에 충실한 존재가 된다.

낮 동안 착실하게 살아가던 마을 주민들은 밤이 되자 금지된 것들을 실행한다. 도둑질, 폭력, 강간, 살인까지…… 그들이 억누르던 욕망이 꿈속에서 분출되며, 마을은 혼돈에 빠진다. 이런 상황 속에서 오직 두 사람만 깨어 있다. 주인공 녠녠과 그의 아버지 리톈바오다.

몽유병과 역사적 죄의식

몽유 상태에 빠진 마을이 현재의 혼돈을 상징한다면, 리톈바오의 과거는 역사적 죄의식을 의미한다. 젊은 시절, 그는 정부의 정책에 협력하여 이웃들의 무덤을 밀고 화장을 강요하는 밀고자가 되었다. 그 대가로 그는 부를 축적했지만, 결국 죄책감 속에서 살아간다. 과거의 악행이 현재의 악몽을 불러온 것이다.

몽유 속에서 벌어지는 혼란과 폭력은 단순한 무의식적 행동이 아니다. 오히려 현실에서 감추어졌던 인간의 가장 어두운 내면을 드러내는 과정이다. 꿈을 믿으며 현실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마치 역사를 부정하며 과거의 책임을 외면하는 이들을 떠올리게 한다.

화자는 왜 ‘어린아이’인가?

소설의 화자인 녠녠은 약간 모자란 열네 살 소년이다. 그는 몽유에 빠지지 않는 유일한 존재로, 마을의 비극을 목격하는 관찰자가 된다.

“열네 살이라는 나이는 죽음의 문에 자라는 한 그루 나무 같았습니다.”

아이의 시선을 통해 사건을 바라본다는 점에서, 이 소설은 더욱 비극적이다. 녠녠은 세상을 순수하게 바라보지만, 그가 보는 현실은 추악하고 잔혹하다. 아버지의 죄, 마을 사람들의 폭력, 역사의 그림자까지, 그는 모든 것을 목격하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옌롄커가 이런 화자를 선택한 이유는 명확하다. 아이의 시선은 왜곡되지 않는다. 그는 마을 사람들의 행동을 판단하거나 해석하지 않는다. 단지 보고, 듣고, 기억할 뿐이다. 이야기를 더욱 객관적으로 만들면서도, 독자들에게 강렬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작가 자신을 등장시킨 독특한 서사 구조

소설에서 흥미로운 점 중 하나는 작가 옌롄커가 등장한다는 것이다. 녠녠은 이야기 초반, 푸녠산맥 꼭대기에 올라가 *“옌롄커가 다시 글을 쓸 수 있도록 해달라”*고 기도한다. 그리고 소설 속 옌롄커는 필력이 다해 더 이상 글을 쓰지 못하는 작가로 묘사된다.

“저는 아무것도 써내지 못할 것 같아요. 아무것도 쓰지 못할 것 같단 말이에요.”

작가가 자신의 문학적 고뇌를 소설 속에서 직접 다룬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자전적 요소까지 포함하고 있다. 이는 단순한 이야기 이상의 의미를 가지게 한다. 창작의 고통과 역사적 기억의 무게가 맞물리며, 소설 속 현실과 독자의 현실이 교차하는 경험을 하게 만든다.

결말 – 해가 떠오를 것인가?

이 소설의 제목은 *『해가 죽던 날』*이다. 마지막 장에서 녠녠은 해가 떠오르기를 바라며 시신 기름을 모아 산 정상에서 불을 붙인다. 그는 마을에 아침이 찾아오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날, 새벽 6시에는 붉은빛이 어김없이 찾아오지 않을 것이었습니다. 어제의 밤은 애초부터 멈춘 적이 없었습니다.”

이 장면은 단순한 일출의 문제가 아니다. *어둠이 계속될 것인가, 아니면 인간이 스스로 새로운 빛을 만들어낼 것인가?*라는 철학적 질문이 담겨 있다. 녠녠은 혼란 속에서도 희망을 붙잡으려 하지만, 결국 해가 떠오를지는 명확하게 제시되지 않는다.

결론 – 꿈인가, 현실인가?

옌롄커는 이 작품을 통해 단순한 몽유병 이야기가 아닌, 인간의 욕망과 역사적 죄의식,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탐구한다.

  1. 몽유하는 마을 – 현실을 부정하고 꿈속에서 살아가려는 인간
  2. 리톈바오의 죄 – 과거의 잘못이 현재의 악몽을 불러온다
  3. 녠녠의 시선 – 순수한 눈으로 바라보는 세계의 부조리
  4. 작가 옌롄커의 고뇌 – 문학이란 무엇인가? 역사는 무엇을 기록해야 하는가?

결국 *『해가 죽던 날』*은 현실을 직시하지 않는 사회는 끝없는 어둠 속에서 헤매게 될 것이라는 경고를 담고 있다. 하지만 녠녠처럼 누군가가 빛을 만들려 한다면, 해는 다시 떠오를 수도 있다.

이 소설은 마치 한 편의 악몽처럼, 읽고 난 후에도 오래도록 독자의 머릿속을 맴돌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꿈을 꾸고 있는가, 현실을 살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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